추모글 목록

추모의 글: 1359
성명 추모의 글 시각
배현주
어두움 속에서 큰 빛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
2020-10-05
박영선
멋진선생님의
명복을빕니다
2020-10-05
이진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20-10-05
윤이경민
선생님 덕분에 제 삶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10-05
조영옥
선생님의 발자취 마음에 새기며 명복을 빕니다.
2020-10-05
한성희
삼가고인의명복을빕니다. 선생님이 남기신 고된 발자취 이제 저희가 이어 가겠습니다. 편히 잠드십시오
2020-10-05
이광택
이이효재 선생님의 선각자적 지도로 우리나라 여성운동이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저는 70년대부터 여성노동자들의 애환을 함께 하였고 노동법학자가 되어 성평등한 사회건설을 소망하였습니다. 순간순간 마다 선생님의 역할과 가르침이 힘에 되었습니다. 이제 그 짐을 내려놓으시고 편히 잠드소서...
2020-10-05
정여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20-10-05
신기원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감사 드립니다.
2020-10-05
박홍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20-10-05
손인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20-10-05
최경자
선생님의 삶, 고맙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2020-10-05
이란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20-10-05
이제윤

​선생님.

오늘은 선생님과의 사십여년의 인연과 이별하는 날입니다.비행기표를 사고도 코로나 상황이라 94세의 노모가 신경쓰여 조문을 가지 못한 마음에 추모의 글로나마 선생님과의 이별의식을 하려 합니다.



선생님과 함께 한 장면 장면을 돌아보니 저와는 보통 인연이 아닌 것 같아요.

처음 선생님과의 만남은 책을 통해서 였습니다.대학 2학년 때 선생님이 제3세계 여성운동을 한국에 처음 소개하신 '여성해방의 이론과 실제'라는 책을 읽은 것이 제가 여성운동과 처음으로 접하고 이끌어 준 것이었습니다. 이 책은 제가 그 후 이십여년 여성운동을 할 수 있는 기초를 열어주었답니다.

또 갓 대학을 졸업하고 제가 스물네살이 되던 해 저의 첫 직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이효재 해직교수 연구실에서 선생님과 만나 함께 일하게 된 행운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어요. 제가 맡은 일은 한국에서 가족 집단 자살에 대한 연구 자료를 수집하는 일이었는데. . 선생님께서 재활용하여 농사에 쓴다고 농촌에 보내기 위해 컵라면 용기와 끈을 캐비넷에 모으시던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당시는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던 1983년이었고 실천하시는 모습이 당시 어린 제 마음에 깊이 본받음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별로 실천력 있는 사람이 아니랍니다.



해방 후 최초로 진보 여성운동을 표방했던 여성평우회는 선생님께서 한국에 소개하신 제3세계 여성운동의 가치과 지향에 영향을 받아 활동을 구현한 단체였고 저도 여성평우회에서 여성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 후 여성평우회,한국여성노동자회,한국여성단체연합,한국여성사회교육원에서 선생님과 함께 여성운동의 발걸음이 이어가게 되었지요.

​1995년 부산여성사회교육원 창립 행사에 선생님을 초대해 창립 모금행사를 하는데 이효재 선생님 활동의 발자취에 대한 슬라이드를 상영하고 지은희 전장관님과 대담 프로그램을 통해 선생님의 삶의 여정을 함께 되돌아보는 프로그램을 열었돈 기억이 납니다. 당시에 비행기표만 겨우 보내드렸는데 부산까지 기꺼이 오셔서 함께 모금행사에 도움을 주시고 송정으로 바닷가 나들이를 함께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1997년 인도에 가 있을 때 이혼소식을 들으시고 마음아파 하시며 손편지와 함께 홍삼을 보내주셨지요.인도에서 감사의 눈물을 흘렸었답니다.

​여성운동으로 이어지던 인연은 제가 요가지도자로 전업을 하고 선생님께서 제주도로 이사오시며 다른 면으로 진화했어요. 선생님은 명상을 하시고 정신적인 면에 관심을 더 가지셔서 매일 명상을 하고 계셨습니다. 함께 명상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제가 하는 이완휴식요가를 해드리기도 했지요. 글귀를 반복해서 외우는 만트라 명상을 하신다는데 그 글귀가 남북 통일이라는 말씀을 듣고 무척 놀랐었습니다. 민주화와 국민을 생각하는 마음, 여성과 노동자를 생각하는 마음,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마음이 남다르시다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어요.

아, 선생님의 별명이 생각나네요. "감격시대" 아마도 열정과 담백한 마음, 실천성을 상징하는 별칭이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제주에서 혼자 추석을 보낼 때 선생님 댁에 가서 명절을 보내면서 아, 믿고 의지할 어른이 계시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실감할 수 있었어요. 그 때 제가 자동차 사고로 지팡이를 집고 다녔는데 오래도록 제가 카드로 신년 인사를 드리면 꼭 손편지의 답장을 받기도 했었어요. 나중에는 편지를 쓰셔서 사진을 찍어 카톡으로 보내주셨지요. 본인은 옆에 돌봐주는 사람이 있어서 이렇게 좋은데 아픈 저를 돌봐줄 사람이 없다며 안타까워하셨지요.

​병원으로 문병을 갔을 때 "하느님께 기도해주세요. 나 좀 빨리 데려가시라고. ." 하시던 선생님, 하느님의 품안으로 가셨으니 편안하시겠지요. 어른이 살아계시다는 것 만으로도 힘이 된다고 말씀드렸었는데. . 이제 뵐 수 없다 생각하니 마음이 울컥합니다.

선생님이 많은 여성들, 국민들의 마음에 미친 영향은 말로 표현하고 열거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평등, 그리고 평화통일에 얼마나 기여했는지와는 별도로, 정치적이지 않은 순수한 마음, 재산을 여성단체에 기부하시고 , 고향으로 내려가셔서도 지역사회를 위한 순수하게 봉사하시며 평생 권위주의적인 모습이 없으셨던 선생님, 무엇보다 돌아가시기 전에 종교적으로나 영성적으로나 성장해나가신 선생님,, 커다란 울림이 되어 제마음에 살아계실 겁니다.
2020년 10월 5일
이제윤 드림
2020-10-05
이수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20-10-05